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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5일 화요일

협동, 그 기다림의 미학을 위하여...

사회적기업가 스쿨에서 성미산마을의 태동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성미산마을극장 유창복대표로 부터 들었다. 도심 한복판에 그러한 공동체 정신이 살아있는 마을을 가꾸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생생한 현장의 검증은 틈만 나면 도심을 탈출할 기회만을 엿보던 나에게 작은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또한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 포기해 버린 좋고 소중한 가치들이 이러한 혁신적 활동에 의해 되살려 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잠깐 따뜻해지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에게 더 큰 생각과 고민을 던져준 것은 다름아닌 협동에 대해 성미산 사람들이 보여준 생각과 실천이었다. 협동은 듣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소중한 공동의 체험, 그리고 협동이 가져오는 비효율성과 그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고, 끝내 기다릴 줄 아는 현명함으로 열매를 맺어낸 그 지혜가 나에게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그러나 멀리 가려면 함게 가라"
내가 늘 되새기는 이 구절처럼, 나 역시 협동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현실에서 적용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고 이는 협동을 통한 일의 진행이 상대적으로 지식과 경험, 그리고 자원이 부족한 작은 조직이 큰 조직과 경쟁할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조직의 규모가 커지고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험과 자원이 쌓여감에 따라 이러한 협동의 유효함은 또 다른 측면에서 불편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다름아닌 비효율성이었다. 초반 일천한 지식과 경험은 자연스럽게 십시일반의 협동을 요구하게 되었으나, 조직 내 쌓여진 경험과 과거에 비해 풍부한 자원은 특정한 상황이나 문제에 적합한 인적자원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잉태하기 시작한다.그리고 이는 협동에 의한 해결보다는 개인에게 의지하는 해결방안을 선호하게 되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특정 몇몇의 사람이 보다 많은 권력을 소유하게 되는 결과를 야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를 해결하거나, 일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데 보다 효율적인 방법이라는데 생각이 미치게 된다.


어찌보면. 이는 조직의 발전과정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효율성이라는 개념의 함정에 빠진 결과가 아닌지 질문해본다. 분명 정해진 시간, 특히 짧은 시간내에 특정한 결과를 내기 위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잣대가 바로 효율성이기 때문이다. 빠른 시간 내의 결과를 바라는 마음은 결국 검증된 사람과 익숙한 프레임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것이고, 이는 자연스럽게 조직의 권력의 집중이 일어나고, 그 권력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과 수평적 관계의 훼손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는 결론적으로 협동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협동이라는 방식이 결과를 내기 위한 임계점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성미산마을의 경험은 좋은 시사점을 주는 듯 하다. 성미산 마을의 협동에 대한 공동 체험과 최근의 성과에 이르기까지는 어언 1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주 비효율적인 토론과 참여.. 그러나 그 지난했던 토론과 참여는 구성원들에게 듣기와 소통의 역량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고, 마침내 2003년 이후에 그 가시적 성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임계점에 이르기 위해 그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2시간의 강의로 성미산마을 사례의 실제를 모두 이해하고 분석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또 그것을 분석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협동이라는 조직운영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효율성이라는 잣대를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이번 강의를 통해 새삼 되새기게 되었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협동은 필연적으로 그 결과가 나오기 까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며, 오히려 당장의 빠른 단기적 효과와 결과에 대한 집착이 협동적 방식을 저해하는 가장 큰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상기해 본다.


더 멀리 보는 큰 안목이 필요하겠다.

2010년 6월 1일 화요일

심상정후보의 눈물을 보면서

지방선거 막바지를 앞두고 결국 심상정 진보신당 경기도지사 후보가 눈물의 사퇴 기자회견을 했다. 어찌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나, 막상 눈물을 흘리며 지지자들에 대한 사과의 말과 유시민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나는 한국사회의 진보정치 현주소를 보는 듯 하여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한나라당의 독주를 막아야 한다는 현실론이, 오차범위내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는 경기도지사의 선거판세가 결국 얼마 안되는 자신의 존재기반 조차도 포기해야 하는 냉혹한 현실이 또 재현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선택이 올바른 것이냐 그렇지 않은 것이냐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의견을 달리 할 수 있으나, 한국사회에서 일명 진보정치와 진보정당의 홀로서기가  앞으로 얼마나 험난할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올해 지방선거의 주요한 이슈 중 하나가 바로 무상급식이었다. 그동안 이 무상급식 전면시행이라는 사회적 이슈를 공론화 하기위해 노력한 것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었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분배와 복지에 대한 정책을 중요시하는 것이 진보정당의 패러다임이기에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일로 보여지기도 한다. 더욱이 이 사회적 이슈는 지방선거와 맞물리면서 민주당은 물론이고 한나라당 조차도 자신의 공약으로 받아드릴 정도로 전폭적인 국민적 지지를 얻었고, 이제 지방선거의 결과에 무관하게 어떤 방식으로든 무상급식에 대한 이슈는 제도화 되어질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분명히 우리사회의 여러과제 중 하나가 보다 진전된 형식으로 제도화 됨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에 대한 박수와 격려는 이를 최초로 제기한 그룹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 그룹이 정당이라면 지지율이라는 것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 무상급식이라는 주요한 이슈에서 진보정당의 존재는 거의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이 논쟁을 둘러싼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공방만 보여질 뿐이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혁신적 창의력과 기술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던 중소기업이 자본력을 앞세운 대기업에게 고스란히 그 시장을 내어주고 물러나야 했던 냉정한 비지니스 세계가 떠올랐다. 식혜음료 시장을 만들어냈으나, 결국 대기업들에게 그 시장을 헌납해야 했던 비락식혜의 경우가 그러하고, MP3시장을 만들어 냈으나 부도직전까지 내몰렸던 아이리버 역시 비슷한 사례가 될 듯 하다. 그것이 비지니스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을 불문하고, 경쟁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이는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런 일반적인 경쟁환경 속에서도 지속적인 혁신으로 대기업으로까지 성공한 사례도 분명 존재할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중소기업이나 중소정치세력으로서의 진보정당의 존재가 바로 그런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사회적 자양분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한국경제가 가지고 있는 고질적 문제를 지적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중소기업의 취약성이다. 대기업의 하청기지로 전락한 중소기업은 결코 스스로의 시장과 혁신적 제품을 내어놓는 것이 쉽지 않을 뿐더러. 중소기업이 담당해야 하는 고용과 내수시장의 취약함은 대기업 위주의 수출중심적인 한국경제가 결국 세계경제의 의존성 심화와 고용없는 성장의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비단 경제의 영역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분배와 복지를 강조하는 진보정치 그룹의 존재없이, 성장과 경쟁의 패러다임에 기반한 두 거대정당의 독점적 지위만이 보장될 때 과연 우리사회가 균형있게 디자인 되고 발전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할 때 나는 결코 자신있는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중소기업의 창의성을 육성하고 그 시장을 보호하고자 여러가지 제도가 존재하듯이, 나는 진보적 담론을 생산하고 기존의 패러다임에 반하는 혁신적 이슈들을 제기하는 진보정당은 반드시 우리사회가 육성하고 보호해야 하는 존재하고 생각한다. 이러한 진보정당의 소중한 가치가 늘 선거때 마다 나오는 현실론에 부딪혀 뒷전으로 밀리는 것이 항상 아쉽기만 한다.

심상정후보의 사퇴가 경기도지사 선거 결과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적 대안이라는 이름으로 아직 피지도 못한 진보정당에게 또 한 번 가혹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심상정후보가 기자회견장에서 보인 눈물이 내게는 그래서 더 아프고 미안하게 다가왔다.

2010년 5월 7일 금요일

우리는 왜 이런거 못 만드냐고?


요즘 내 고민과 일맥상통하는 좋은 글이 있어 담아왔다.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또 사업을 하면서 항상 어떻게 잘 할것인가를 고민해 왔다. 어떻게 하면 경쟁력을 갖추고 어떻게 하면 보다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까? 그러나 어느 순간..  "어떻게" 이전에 "왜?"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다. 내가 왜 사업을 하는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 "왜"라는 질문은 단순한 실용적 아이디어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인문학적 고민과 성찰이 있어야 어떠한 답을 내릴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러한 고민과 성찰을 진지하게 할 기회도 훈련도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다. 고전이라 불리는 수 많은 성인들의 진지한 삶의 성찰이 담긴 열매를 제대로 맛보지도 못하고 성장한 나에게, 불혹의 나이에 마주선 "왜"라는 질문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이것이 과연 나만의 게으름에서 온 것인가?

이제 대학의 학문 조차도 돈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구분되어지는 현실은.. 과연 우리사회에 희망이 있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으로 까지 나아가게 만든다..  시험점수와 입시에 내몰린 우리 아이들에게 고전을 읽고 음미하며 방황하는 시간이 과연 허락될 수 있을런지.. 그런 의미에서 이글은 여러가지로 많은 생각과 느낌을 준다.


대학에서 뉴미디어를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깨달은 게 있다. 기술과 사회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기술이나 혁신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소멸하는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기술의 사회적 형성'이라는 관점으로 한국사회를 살펴보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우선 "우린 이런 거 왜 못 만드냐"는 질문에서 시작해 보자. 최근 들어 정계와 재계의 지도자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말이다. 애플의 아이폰과 닌텐도의 게임기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윗분들'의 훈계 속에 양념처럼 들어가기 시작한 '유행어'기도 하다.

당사자가 의도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기술과 사회의 관점에서 '우린 이런 거 왜 못만드냐'는 물음은 상당히 전복적인 의미를 갖는다. '우리 사회는 왜 이 꼴이냐'고 묻는 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는 그가 몸담은 조직과 그 조직을 포함하고 있는 국가 모두를 의미한다.

  
▲ 애플 사의 오랜 모토는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다.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기업으로 평가 받는 애플의 저력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여주는 사훈이다. 위계적인 기업의 문제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윗사람'의 생각이라면 특히 더.
ⓒ Apple
 애플
 
못 만드는 이유?

결론부터 말해 보자. 흔히 '질문 속에 답이 있다'는 말을 한다. 이 상황에 정확히 부합하는 말이다. '이런 거 왜 못 만드느냐'고 묻는 것은 질문자가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백하는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만들자'고 말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모두 지도자들이다. 조직에서 가장 강한 권력과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사람들 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거 왜 못 만드냐'고 묻는 지도자가 많을수록 그걸 만들어 낼 가능성은 낮아진다.

두 번째는 이런 질문을 태연히 던질 수 있게 하는 위계적 사회구조다. 위계 사회에서 '왜 못 만드냐'는 말은 질문이 아니라, 질타이고 추궁이며 명령이다. 여기서 자신의 책임은 빠져있다. (자기는 방법을 모르지만) '어떻게든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고 있을 따름이다. 

위계적인 조직일수록 소통은 막혀있기 마련이다. 이런 경직된 소통구조 속에서 창의력이 꽃 피기를 바라는 것은 '우린 왜 못 만드냐'는 질문만큼이나 어리석다. 그런 질문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 조직이 창의적인 제품을 만들 수 없을만큼 위계적이고 경직되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게 두 번째 답이다.  

봉건적 위계사회의 비극

애플이 동기가 된, '이런 거 왜 못 만드냐'는 질문은 사실 한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나왔다. 그러나 일본에서 이 물음은 반성과 각성에 가까웠다. 왜 애플같은 회사가 일본에서는 태어날 수 없었느냐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혁신과 첨단기술의 대명사가 된 나라에서 말이다. 그 쟁쟁했던 소니, 도코모, 토요타의 일본에서 말이다.  

흥미롭게도,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주목할만한 답변마저 일본이 아닌 미국에서 나왔다. 2008년 2월 25일자 <뉴스위크>가 '애플이 일제가 아닌 이유'를 설득력 있게 분석한 것이다. 크리스찬 캐릴 기자는 "창의력의 빈곤은 일본의 독특한 기업문화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수직통합된 대기업이 지배하고 있는 위계적 경제환경에서는 융통성과 창의성이 발휘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위계적 조직에서는 반대가 불가능하다. 반대가 불가능한 곳에서 창의적 사고도 불가능하다. 창의성은 기존의 생각을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위계적 기업문화가 재계를 넘어 정치, 교육, 문화의 모든 영역까지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사회 전체가 단일 기업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일본 주식회사(Japan Inc.)'로 전락한 것이다.

기업 내부에서 반대가 불가능하면 밖에서 반대를 해 주어야 한다. 국민이, 언론이, 대학이, 정부가 말이다. 그러나 이들마저 기업조직의 일부가 되고 나면 창의력이 발휘될 여지는 사라지고 만다. '회장님' 좋아하는 언론이나, '기업이 선호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는 사회와 기업 모두에 해가 될 뿐이다.

하물며 정치 지도자가 '국가 CEO'를 자임하거나, 기업이 대학의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나라에서 희망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 애플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기업으로서의 애플이 갖는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애플은 변함 없이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에 서 있었다"고 말했다.
ⓒ 공개자료
 애플

애플과 인문학의 관계

현재 한국 교육계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이 변화는 '통폐합'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예컨대 음악과 미술 수업을 '통폐합'하고 (이런 '창의적 발상'이 가능한 나라에서 아이폰이 안 나온 게 놀라울 뿐이다), 초등학교에서 쉬는 시간을 5분으로 '통폐합'하고, 대학 전공을 "사회 변화의 요구에 따라" 절반 수준으로 '통폐합' 하겠다는 것이다.

쉬운 말로 하면, '노는 시간'을 없애고, '돈 안 되는 전공,' 즉 인문학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 뒤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승인과 지지가 있다. 정부는 이런 '교육개혁'을 주도하면서 '창의성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야심찬 "한국형 스티브 잡스 양성계획"도 나왔다. "탈락시스템에 따라 3단계의 검증 과정을 거쳐" 10명 안팎의 "소프트웨어 마에스트로"를 선정한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선발할지 모르지만, 대단한 '스펙'을 갖춘 실력자들이 몰려들 게 틀림 없다(조롱이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지원해도 탈락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어쩌나. 스티브 잡스는 한국 정부가 그렇게 없애고 싶어하는 두 골칫거리의 산물이니 말이다. 바로 '인문학'과 '노는 시간'이다.

지난 1월, 스티브 잡스가 신제품 '아이패드'를 선보인 날이었다. 그는 애플 사의 정체성을 설명하면서, 대형 스크린으로 표지판 사진을 보여주었다. 교차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내판이었지만, '길 이름'이 독특했다. 서로 엇갈린 두 개의 표지판에는 '인문학(Liberal Arts)'과 '기술(Technology)'이라고 쓰여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의미를 설명했다.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입니다. 애플은 언제나 이 둘이 만나는 지점에 존재해 왔지요."

  
▲ 미국의 대학에서 인문학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진은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인문/예술/사회과학 프로그램 웹사이트. "위대한 사상이 세계를 바꾼다"는 표어가 보인다. 하프를 연주하는 사진 오른쪽에 "컴퓨터는 음악이론을 배울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음악과 컴퓨터 기술을 접목시킨 최신 연구들을 소개하고 있다.
ⓒ MIT
 MIT

'미국식 교육'의 중심은 인문학

'미국식 교육'을 잘 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식 교육을 '돈 되는 실용교육'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지역과 규모를 막론하고 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대학의 공통점이 있다. 하나 같이 뛰어난 인문학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첨단 기술연구로 알려진 매사추세츠 공대(MIT)는 훌륭한 철학, 언어학, 문학, 예술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으며,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 수업을 들어야 한다.

미국 대학의 전통은 크게 두 축이 있다. 연구중심 종합대학과 학부 중심의 인문대학이 그것이다. 인문학은 종합 연구대학에서도 중요한 기능을 하지만,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라 불리는 학부 중심 인문대학에서 더욱 큰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오바마 대통령도 콜럼비아 대학으로 옮기기 전 '옥시덴탈 칼리지'라는 학부 인문대학을 다녔다. 비록 한 학기만에 그만 두기는 했으나, 스티브 잡스가 다녔던 '리드 칼리지'도 학부 중심 인문대학이었다. 그는 청강으로 들었던 서예수업을 '생애 최고의 수업'이었다고 말한다. 물론 '생애 최고의 선택'으로는 '학교를 때려 치운 것'를 꼽았지만 말이다(게다가 대학 졸업 축사에서 이 말을 했다).

미국 대학이 '리버럴 아츠'라는 이름으로 가르치는 것은 뭘까? 크게 세 가지다. 커뮤니케이션(소통) 능력, 비판적이고 윤리적 사고, 분야에 얽매이지 않는 폭넓은 교양.

미국에서 인문교육은 '취업에 도움이 되는 실무 지식이나 실용적 기술'의 반대 의미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 한국 정부가 싫어하는 것들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과정인 셈이다. 스티브 잡스는 이런 '불온 교육'을 성공 비결로 내세운 것이다.

  
▲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의 리드 칼리지. 학부 중심으로 인문학적 교양을 가르치는 미국적 전통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 가운데 하나다. 스티브 잡스는 이 학교를 한 학기 동안 다닌 후 자퇴했다.
ⓒ 공개자료
 잡스
인문학, 왜 중요한가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실용주의가 발달했다는 미국에서 왜 '돈 안 되는' 교육이 대접을 받는 것일까? 간단하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저 돈만 되는 게 아니라, 더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인문학 교육은 '고전 교육'이다. 고전(classic)이란 세월이 흘러도 의미를 잃지 않는 인류의 성과물을 말한다. 실무용 지식과 기술은 하루가 멀다고 변하지만, 소통능력, 비판능력, 윤리의식, 보편적 교양의 가치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문학적 기초가 있는 사람은 실무 지식도 쉽게 배운다. 쉽게 배울 뿐 아니라, 제대로 배운다. 제대로 배울 뿐 아니라, 그 지식을 올바로 쓸 줄 안다. 하지만 그 반대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교육을 투자에 비유한다고 하자. 당신이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디에 투자하겠는가? 

지금 한국의 기업과 정부와 대학이 실패하고 있는 이유는 실무적 지식이나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소통능력, 비판능력, 윤리의식, 보편적 교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주장하는 '대안'은 죽어가는 인문학을 뿌리까지 없애고 그 자리에 단편적인 실용지식과 기술을 채워 넣는 것이다.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인문학에 존경심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미래 경쟁력의 토대인 창의력까지 죽이고 있다는 점이다. 인문학적 비판 능력은 '남과는 다른 생각,' 즉 창의력의 토대가 된다. 인문학이 강조하는 윤리의식은 배려와 협력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할 수 있게 해 준다. 한국에서 애플이 나올 수 없는 세 번째 이유다. 

  
▲ <와이어드>지는 2009년 6월호 표지기사를 통해 소셜 미디어 혁명을 다루면서 '신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썼다. 온라인상에서 펼쳐지는 협력과 공유 운동이 경제모델을 새롭게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와이어드>는 이 새 경제모델을 "신 신경제(New New Economy)"라고 이름 붙였다.
ⓒ Wired
 신 사회주의

경쟁교육은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

유치원생이 영어공부 하느라 놀 시간이 없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단다. '무한 경쟁 시대'에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학생이 성적을 비관해 아파트 난간에서 몸을 던진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단다. 자본주의는 경쟁체제이고, 경쟁을 권장해야 '선진 일류국가'가 될 수 있는 만큼, 이런 '부작용'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진국 문턱'에서 좌초하고 만다는 이야기다.  

국가 지도자가 '선진 인류국가'와 '선진국 문턱'을 말할 때마다 내 입에서는 이런 무엄한 소리가 흘러 나온다.

"젠장, 그 문턱은 길기도 하다…."

유치원 시절에 듣던 '선진국 문턱' 이야기를 중년이 다 되어서까지 듣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장담컨대, 내 생전에 한국이 '선진국 문턱'을 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비관적인 이유가 있다. 한국 정부가 말하는 '선진국'은 다가서면 사라지는 신기루다. 당나귀 머리 앞에 달아놓은 당근. 주인을 태운 당나귀는 당근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걷지만, 죽는 날까지 당근을 입에 대지 못한다. 그 당근은 새 당나귀의 머리에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내 비관론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정부가 말하는 '경쟁교육'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경쟁 교육은 나누고 배려하는 사람을 배출하지 못한다. 한국식 경쟁 교육에서 앞서가는 '비결'은 빼앗고 감추는 것이다.

그러나 리눅스, 위키피디아, 플리커, 앱스토어, 트위터, 페이스북의 성공에서 보듯, 뉴미디어 시대에서는 '나눔'과 '배려'가 새로운 경쟁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와이어드>는 이처럼 협력에 기반한 미래의 공동체 경제를 '신사회주의(New Socialism)'라 부른다. 내가 나누면 남도 나눌 것이고, 공동체는 번영하게 된다.

모든 것을 떠나서, 서로 밟고 밟히는 곳에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이것이 한국인들의 행복지수가 낮고, 자살률이 높고,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이유다. 아이폰을 왜 못 만드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이런 식의 경쟁체제를 유지하다간 '한국형 잡스'나 '선진 일류국가'보다 사회 붕괴가 먼저 찾아올 것 같으니 말이다.

2010년 2월 26일 금요일

나는 아사다 마오에게 박수를 보낸다.

김연아의 금메달 소식으로 대한민국이 떠들썩 하다. 세종시 수정안 공방으로 지칠대로 지친 우리들에게 김연아의 금메달 소식은 마른 가뭄의 소낙비 같은 뉴스임에는 분명하다. 더욱이 경기 직후 흘린 그녀의 눈물은 경기를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의 눈물샘과 마음을 촉촉히 적셔 주었다. 아직은 앳띤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부담감에 대한 안스러움과 너무 과한 부담을 준 것 같은 어른으로서의 미안함이 그 같은 공감대를 이루어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눈물은 감격의 눈물이고 기쁨의 눈물이기에 안쓰러움과 미안함은 잠시일 수 있었다.


그러나, 눈물은 김연아만의 것이 아니었다. 여린 어깨에 짊어진 부담의 국적은 다르지만, 오히려 김연아보다 더 큰 짐을 짊어지고 많은 날을 자신과 싸워야 했던 아사다 마오의 눈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음 놓고 울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니 아무도 그녀의 눈물에 관심을 갖을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1등이 아니고, 승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회가 1등을 기억하고, 그 1등을 위해 치열히 경쟁하는 시스템이 더 효율적이며, 그것이 세상을 사는 제1원칙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 힘들어 보인다. 유치원 시절부터 경험하기 시작하는 숫자화된 순서는 입시와 취업이라는 양대 관문을 통과하면서, 경쟁에서 이긴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오직 세상은 1등만을 기억한다는 이 제1원칙을 우리는 너무 충분히 교육 받아서 이미 DNA화 되었기 때문이다.

안도현의 성인동화 "연어"에 보면, 네잎 클로버의 소중함은 너무 흔하게 널린 세잎 클로버 덕분이며, 하늘에 빛나는 별빛은 어둠이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구절이 나온다. 1등은 2등을 전제로 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다는 너무 평범하고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그 당연한 얘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니 어쩌면 잊어버리고 사는데 너무 익숙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1등을 위해 축하하지 말자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 1등을 위해 숙명적으로 존재하는 그 나머지 역시 똑같이 격려받고 관심 받는 사회가 되어야 함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모든 일의 결과는 모든 과정을 다 포함하지 못한다. 특히, 스포츠와 같이 짧게는 수개월 부터 길게는 수년의 걸친 훈련의 고통을 단 몇분에 판가름하는 경우에는, 그 결과가 모든 것을 포함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사다 마오의 눈물을 보면서, 나는 그녀가 견뎌왔던 혹독한 훈련의 고통과 부담은 누가 어떻게 안아주어야 할까를 생각했다. 김연아에게 보내준 박수만큼이나, 아사다 마오에게도 똑같은 양의 박수를 보내주자. 1등과 2등이 똑같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적 의식이 형성될 때 우리 삶의 질도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1등은 하나이고 모든 사람은 2등일 수 밖에 없다. 그 하나의 자리가 내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모든 이가 온 삶을 경쟁의 정글에 내던지는 것 보다, 2등도 1등만큼 중요하다는 성숙된 의식이 자리잡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가 더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오가 울던 그 자리에 김연아가 있게될지, 아니면 바로 그 자리가 우리가 서있는 자리일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것이 내가 아사다 마오에게 박수를 보내는 이유이다.

출처 : 내 미니홈피 : http://minihp.cyworld.com/40579801/227899549